바이에른의 이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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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의 이자보는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의 딸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샤를 6세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으나, 오를레앙 공작과의 불륜설, 부르고뉴파와 알마냐크파 간의 갈등, 잉글랜드와의 백년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겪었다. 트루아 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비판을 받았으며, 말년에는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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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의 이자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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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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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스 왕비 |
재위 기간 | 1385년 7월 17일 – 1422년 10월 21일 |
대관식 | 1389년 8월 23일, 노트르담 드 파리 |
출생일 | 1370년 4월 28일 |
출생지 | 뮌헨 |
사망일 | 1435년 9월 24일 (65세) |
사망지 | 파리 |
매장일 | 1435년 10월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배우자 | 샤를 6세 (1385년 결혼, 1422년 사망) |
자녀 |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브르타뉴 공작부인 잔 마리, 푸아시 수도원장 미셸 드 프랑스 루이, 기옌 공작 장, 투렌 공작 잉글랜드의 캐서린 샤를 7세 |
가문 | 비텔스바흐 가문 |
아버지 | 슈테판 3세, 바이에른 공작 |
어머니 | 타데아 비스콘티 |
이름 | |
프랑스어 | Isabeau de Bavière |
독일어 | Elisabeth von Bayern (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 |
2. 혈통과 결혼
이자보의 부모는 바이에른 공작 슈테판 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였는데, 타데아는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장녀였으며, 100000두카트의 지참금을 받고 슈테판 공작에게 시집갔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로 손꼽혔지만, 비텔스바흐 가문의 일원들 사이에서 여러 차례 분할되기도 했다.[3] 비스콘티 가문은 강력한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정치적 관계를 맺고 싶어했고, 타데아의 형제자매 셋도 이 가문의 여러 지파와 결혼했다. 이자보는 아마도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성모 교회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2][3] 그녀의 주목할 만한 비텔스바흐 가문의 조상으로는 증조부인 신성 로마 황제 루이 4세가 있었다.[7][4]
이자보의 대관식은 1389년 8월 23일 파리에서 호화로운 의례적 입성을 통해 거행되었다. 대관식 행렬에 참여한 귀부인들은 금실 자수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을 입고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들것을 타고 다녔다. 용담공 필리프는 40마리의 양과 40마리의 백조가 수놓아진 더블렛을 입었는데, 각 동물에는 진주로 만든 종이 장식되어 있었다.[1]
샤를 6세는 1387년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단독으로 왕권을 장악했다. 그의 첫 번째 행동은 섭정 역할을 해왔던 삼촌들을 해임하고, 아버지인 샤를 5세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하급 귀족 집단인 소위 마르무제들을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에게 국사에 대한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다. 몇 년 후, 국왕의 첫 번째 발작 이후 오를레앙 공작과 세 명의 왕족 삼촌들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베리 공작 장, 그리고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자보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권력 투쟁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했고, 다양한 궁정 파벌 사이에서 평화 유지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자보의 행적과 정치 활동은 남편 샤를 6세의 반복되는 질병으로 인해 그녀가 차지하게 된 권력 때문에 결혼 이후 잘 기록되어 있다. 이자보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될 권력 투쟁 속에서 평화를 유지해야 했고, 다양한 궁정 파벌 사이에서 평화 유지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자보는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각 자녀의 출생은 물론 출산 당시 방의 장식 계획까지 상세히 기록될 정도로 자녀에 대한 기록이 잘 남아있다.[1] 여섯 아들과 여섯 딸 중 첫째 아들 샤를(1386년 출생)과 막내 아들 필립(1407년 출생)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다른 세 아이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막내 아들 샤를 7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여섯 딸 중 다섯 명이 살아남았는데, 네 명은 결혼했고, 마리(1393–1438)는 네 살 때 푸아시의 수도원에 보내져 수녀원장이 되었다.[88]
이자보의 12명의 자녀 각각의 출생은 잘 기록되어 있으며,[21] 심지어 그녀가 출산했던 방의 장식 계획까지 묘사되어 있다.[1] 그녀는 여섯 아들과 여섯 딸을 두었다. 1386년에 태어난 첫째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고, 1407년에 태어난 막내 필립은 하루만 살았다. 세 명의 다른 아이들이 어릴 때 죽었고 막내 아들 샤를 7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여섯 딸 중 다섯 명이 생존했고, 네 명은 결혼했으며, 한 명인 마리 (1393–1438)는 네 살에 수녀원에 보내져 수녀원장이 되었다.[88]
[1]
서적
Gibbons (1996), 68
1383년, 이자보의 삼촌인 바이에른 공작 프리드리히는 그녀를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신붓감으로 고려할 것을 제안했다. 이 혼담은 1385년 4월 캄브레에서 열린 화려한 부르고뉴 이중 결혼식에서 다시 제안되었다. 이 행사에서 네베르 백작 장(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의 뒤를 이어 무장공 존으로 알려짐)은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와 결혼했고, 장의 여동생인 부르고뉴의 마르가레테는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의 형제 중 한 명인 바이에른-슈타우빙 공작 빌헬름 2세와 결혼했다. 당시 17세였던 샤를은 결혼식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그는 잘생기고 신체 건강한 젊은이였으며, 마상 시합과 사냥을 즐겼고 결혼을 갈망했다.[5]
샤를 6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프랑스를 다스린 섭정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국왕의 삼촌인 무장공 필리프는 이자보와의 결혼이 잉글랜드 왕국에 대항하여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는 이상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6] 이자보의 아버지는 마지못해 이 계획에 동의했고, 그녀를 아미앵 순례 여행을 간다는 핑계로 그녀의 형제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프랑스로 보냈다. 아미앵에는 당시 유명한 유물(세례자 요한의 머리)을 보관하고 있는 대성당이 있었다.[7] 그는 그녀가 샤를의 신붓감으로 검토받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데 단호했고,[1] 당시 관례였던 그녀의 나체 검사를 허락하지 않았다.[3] 동시대 연대기 작가 장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이자보는 혼담이 오갔을 때 13세 또는 14세였고, 1385년 결혼 당시 16세였으므로 137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7]
샤를에게 소개되기 전에 이자보는 약 한 달 동안 에노를 방문하여 그녀의 외삼촌인 홀란트 백작이자 바이에른-슈타우빙 가문의 상속 영토의 일부를 통치했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머물렀다. 알브레히트의 아내 브리그의 마르가레테는 이자보에게 프랑스 궁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을 바이에른식 의복을 버리고 프랑스 궁정에 적합한 예절을 가르쳤다. 그녀는 재빠르게 배우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그녀가 지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을 가졌음을 시사했다.[8] 1385년 7월 13일, 그녀는 샤를에게 소개되기 위해 아미앵으로 갔다.[1]
프로아사르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이자보가 검사를 받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 당시의 기준에 따라 완벽한 행동을 보였다고 썼다. 두 사람의 결혼은 아라스에서 거행될 예정이었지만, 첫 만남에서 샤를은 "그녀가 아름답고 젊다는 것을 보고 그의 마음에 행복과 사랑이 들어섰고, 그녀를 바라보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라고 말했다.[9] 그녀는 아직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고, 당시 유행하지 않던 어머니의 어두운 이탈리아적 특징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어, 당시의 이상적인 미를 반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과 이자보는 불과 3일 만에 결혼했다.[1] 프로아사르는 연회에 참석한 음탕한 손님들과 "뜨거운 젊은 부부"에 대한 농담과 함께 왕실 결혼식을 기록했다.[10]
샤를은 젊은 아내를 사랑하는 듯했고,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쏟아부었다. 1386년 새해에 그는 그녀에게 구리와 얽힌 K와 E(''카롤과 엘리자베스''를 의미)로 장식된 붉은 벨벳 말 안장을 주었고, 반지, 식기 및 의류를 계속해서 선물했다.[1] 국왕의 삼촌들 또한 이 결혼에 만족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대 연대기 작가들, 특히 프로아사르와 미셸 팽토앵(생 드니 수도사)은 이자보의 아름다움에 의해 촉발된 욕망에 뿌리를 둔 결혼이라고 유사하게 묘사한다. 결혼 다음 날, 샤를은 잉글랜드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위해 떠났고, 이자보는 그의 계증조모인 나바라의 블랑슈와 함께 살기 위해 크레일로 가서 궁정 전통을 배웠다. 9월에 그녀는 뱅센 성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결혼 초기에 샤를은 종종 그녀를 만났으며, 곧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집이 되었다.[1]
3. 대관식
행렬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다. 거리는 타블로 비방으로 장식되었다. 1,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섰는데, 한쪽은 녹색 옷을, 반대쪽은 붉은 옷을 입었다. 행렬은 생-드니 문에서 시작되어 하늘색 천막 아래를 지나갔는데, 천막 아래에는 천사 복장을 한 아이들이 노래를 불렀고, 생-드니 가를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하여 대관식을 거행했다.[1] 터치먼은 이 사건을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광경을 보고 감탄하느라, 행렬이 노트르담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 절정에 달하는 전시가 벌어지기까지 저녁이 되었다"고 묘사했다.[11]
이자보가 노트르담 다리를 건너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향할 때, 천사 복장을 한 사람이 기계 장치를 통해 교회에서 내려와 다리를 덮고 있던 금색 백합 문양이 있는 파란 태피터로 만든 막의 틈새를 통과하여 "그녀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그 후 천사는 교회로 다시 끌어 올려졌다.[12] 두 개의 촛불을 든 곡예사가 대성당 첨탑에서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까지 매달린 밧줄 위를 걸어갔다.[1]
이자보의 대관식 이후, 행렬은 500개의 촛불로 밝혀진 길을 따라 대성당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왕실 연회와 중세 연극의 진행에 의해 환영받았으며, 트로이의 몰락을 묘사하는 장면이 포함되었다.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이자보는 축제의 5일 중 첫날 더위로 인해 기절할 뻔했다. 호화로운 행사를 치르기 위해 두 달 후 파리에서 세금이 인상되었다.[13]
4. 샤를 6세의 정신 질환과 섭정
샤를 6세는 1392년 8월 르 망 외곽에서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수행원들을 공격하고 4명을 살해하면서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14] 공격 후 그는 4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삼촌들인 부르고뉴 공작과 베리 공작은 그의 질병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고 섭정으로 재설정했다.[15]
왕의 갑작스러운 정신병은 신의 분노와 처벌의 징조, 혹은 마법의 결과로 여겨졌다.[15]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편집성 정신분열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16] 혼수상태에서 회복된 샤를은 9월에 파리로 돌아왔다.[15]
샤를의 회복을 돕기 위해 오락 프로그램이 권해졌다. 궁정의 한 일원은 샤를에게 이자보와 다른 부인들에게 야만인으로 변장하여 이자보의 시녀의 재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에 침입하는 일행에 합류하여 놀라게 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발 데 아르덩"(불타는 사람들의 무도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샤를은 거의 죽을 뻔했고, 오를레앙 공작(왕의 형제)이 가져온 횃불에서 나온 불꽃이 무용수 의상 중 하나에 불을 붙이면서 4명의 댄서가 불에 타 죽었다. 이 재앙은 왕의 통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 파리 시민들은 이를 궁정적 타락의 증거로 여기고 귀족들에게 반란을 위협했다. 대중의 분노는 왕과 오를레앙 공작에게 속죄를 강요했다.[17]
샤를은 1393년 6월에 두 번째 정신병 발작을 겪었고, 약 6개월 동안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18] 그는 질병이 발생한 처음 20년 동안 통치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한 기간을 경험했다. 섭정으로 그를 교체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섭정이 살아있는 군주의 완전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과 논쟁이 있었다.[1] 그가 통치할 수 없을 때, 그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과 사촌인 부르고뉴의 용맹공작 장은 정부를 장악하려는 주요 인물이었다.[18]
샤를이 1390년대에 병에 걸렸을 때 이자보는 22세였다. 그녀는 두 명의 유아를 잃은 후 세 자녀를 두었고 1407년까지 7명이 더 태어났다.[21] 그의 가장 심한 질병 기간 동안 샤를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녀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제거를 요구하여 그녀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22] 왕은 정신병 에피소드 동안 종종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존재에 화를 냈기 때문에, 결국 말 상인의 딸인 오데트 드 샹디베르를 정부로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터크먼에 따르면, 오데트는 이자보와 닮았고 "작은 여왕"이라고 불렸다.[25] 그녀는 아마도 1405년까지 이자보의 동의하에 이 역할을 맡았을 것이지만,[26] 그의 회복 기간 동안 왕은 여전히 아내와 성관계를 가졌고, 그녀의 마지막 임신은 1407년에 일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이자보는 1407년 11월 23일 오를레앙 공작 암살의 밤과 1408년에 다시 왕의 방에 있었다.[27]
왕의 질병 발작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와 이자보는 여전히 서로에게 애정을 느꼈을 수 있으며, 이자보는 그의 명료한 기간 동안 그와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그녀는 정신병의 지속적인 발작 동안 거리를 두었다. [28]
5. 궁정 암투와 정치적 위기
1392년, 샤를 6세는 르 망 외곽에서 오를레앙 공작을 포함한 수행원들을 공격하고 4명을 살해하면서 정신병이 발병했다.[14] 공격 후 샤를 6세는 4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샤를 6세의 삼촌들인 부르고뉴 공작과 베리 공작은 이 기회를 틈타 권력을 잡고 섭정으로 재설정했다.[15]
왕의 갑작스러운 정신병은 신의 분노 또는 마법의 결과로 여겨졌다.[15] 현대 역사가들은 샤를 6세가 편집성 정신분열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16]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샤를 6세는 9월에 점차 파리로 돌아왔다.[15]
샤를 6세의 회복을 위해 오락 프로그램이 권해졌고, 궁정의 한 일원은 "발 데 아르덩"(불타는 사람들의 무도회)이라는 가면무도회를 제안했다. 이 무도회에서 샤를 6세는 횃불 불꽃으로 인해 의상에 불이 붙어 큰 화를 입을 뻔했고, 4명의 댄서가 불에 타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건은 왕의 통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고, 파리 시민들은 궁정의 타락을 비난하며 귀족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다.[17]
샤를 6세는 1393년 6월에 두 번째 정신병 발작을 겪었고, 약 6개월 동안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18] 프루아사르는 이 질병 발작을 왕이 "너무나 벗어난 상태였고 어떤 약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고 묘사했다.[19] 그러나 샤를 6세는 첫 번째 발작에서 몇 달 안에 회복되었고,[20] 이후 20년 동안 통치를 계속할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한 기간을 경험했다. 섭정 제안이 있었지만, 살아있는 군주를 대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1] 샤를 6세가 통치할 수 없을 때, 그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과 사촌인 무두공 장이 권력을 잡으려 했다.[18]
샤를 6세가 병에 걸렸을 때 이자보는 22세였고, 이미 세 자녀를 둔 상태였다.[21] 샤를 6세는 심한 정신병 기간 동안 이자보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제거를 요구하여 이자보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22] 이자보는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자 그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역사학자 레이첼 기번스는 정신병자와 함께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자보를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옹호했다.[24]
왕이 정신병으로 인해 이자보를 알아보지 못하자, 오데트 드 샹디베르가 정부로 제공되었다. 오데트는 이자보와 닮았고 "작은 여왕"이라고 불렸다.[25] 오데트는 1405년경 이자보의 동의하에 이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26] 샤를 6세는 회복 기간 동안 이자보와 계속 성관계를 가졌고, 이자보의 마지막 임신은 1407년에 있었다.[27]
샤를 6세의 질병 발작은 계속되었지만, 이자보는 명료한 기간 동안 남편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애정을 표현했다. 역사학자 트레이시 아담스는 이자보의 애착과 충성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왕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평가했다.[28]
이자보는 남편의 질병으로 인해 비정상적인 권력의 위치에 올랐고, 그녀의 행적과 정치 활동은 잘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고, 외모에 대해서도 역사가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작고 검은 머리" 또는 "키가 크고 금발"로 묘사되며, 동시대의 증언은 상반된다.[21][29] 이자보는 십 대에 결혼한 이후 프랑스에 계속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짙은 독일 억양으로 말했고, 이는 그녀에게 프랑스 궁정에서 "이방인"의 인상을 주었다.[25] 트레이시 아담스는 이자보를 궁정 정치를 능숙하게 헤쳐나가는 재능 있는 외교관이라고 묘사한다.[30]
샤를 6세는 1387년 왕위에 오르면서 섭정 역할을 해왔던 삼촌들을 해임하고, 아버지 샤를 5세의 고문들을 복귀시켰다. 또한 동생 오를레앙 공작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했다. 몇 년 후, 국왕의 첫 번째 발작 이후 오를레앙 공작과 왕족 삼촌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자보는 권력 투쟁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380년대 후반과 1390년대 초반부터 이자보는 피렌체 대표단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사건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요청했을 때 외교적 영향력을 보여주었다.[31] 1396년, 이자보는 피렌체 대사와 함께 프랑스와 피렌체 간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협상했다.[32][33]
1390년대에 장 제르송은 서방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회의를 구성했고, 이자보는 협상 기술을 인정받아 회의에 참여했다. 프랑스는 아비뇽과 로마 교황이 모두 로마의 단일 교황청을 위해 물러나기를 원했고,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이자보의 중재 능력을 인정하여 그녀의 참여를 환영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가 1394년에 사망하면서 그 노력은 시들해졌다.
1390년대에 샤를 6세는 이자보가 왕태자(도팽)의 "주요 보호자"가 되어 섭정 위원회에서 추가적인 정치적 권력을 갖도록 조치했다.[21] 1393년, 샤를 6세는 이자보를 자녀들의 공동 보호자로 임명했고, 이는 왕족 공작들과 그녀의 형제인 바이에른의 루이와 공유되는 지위였으며, 오를레앙에게 완전한 섭정 권한을 부여했다.[34] 이자보를 임명하면서 샤를 6세는 아버지 샤를 5세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왕비에게 왕위 계승자를 보호하고 교육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35] 이듬해, 샤를 6세의 발작이 더욱 심각해지면서 이자보는 섭정 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왕족 공작과 프랑스 대원수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다양한 궁정 파벌의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21]
샤를 6세가 병을 앓는 동안, 오를레앙 공작은 재정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고,[36] 이후 10년 동안 이자보와 오를레앙은 세금 인상에 합의했다.[27] 1401년, 오를레앙은 왕실 수입 징수에 자신의 사람들을 배치했고, 이에 분노한 용담공 필리프는 군대를 소집하여 파리에 진입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자보는 오를레앙과 부르고뉴 사이에서 중재하여 유혈 사태를 막았다.[1]
샤를 6세는 1402년까지 이자보를 신뢰하여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도록 허락했고, 재무부 통제권을 그녀에게 넘겼다.[21][1] 1404년 용담공 필리프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두공 장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자,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자보는 왕관과 자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오를레앙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장이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불신했다.[37]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근친상간으로 여겨졌다. 이 소문은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1405년에 명령한 세금 인상에 대한 보복으로 퍼졌을 가능성이 있다.[1][27] 자크 르그랑은 이자보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고, 풍자적인 정치 팜플렛인 《진실한 꿈》(Songe Veritable)이 파리에서 배포되어 왕비와 오를레앙의 관계를 암시했다.[39]
무두공 장은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재정을 잘못 관리했다고 비난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실 수입 손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1] 1405년, 장은 기사 1,000명으로 군대를 일으켜 파리에 입성했고, 이자보와 오를레앙은 멜룅 성으로 후퇴했다. 장은 도팽을 사로잡아 파리로 돌려보냈지만, 베리 공작이 왕실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 아이를 통제했다. 샤를 6세는 약 한 달 동안 정신이 맑아져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도팽 납치'로 알려지게 되었고,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41] 10월, 이자보는 크리스틴 드 피잔의 편지와 왕실 평의회의 조례에 따라 분쟁을 중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2]
6. 오를레앙 공작 암살과 그 여파
1390년대에, 훗날 파리 대학교 총장이 되는 장 제르송은 서방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회의를 구성했고, 그녀의 협상 기술을 인정하여 이자보를 회의에 참여시켰다. 프랑스는 아비뇽과 로마 교황이 모두 로마의 단일 교황청을 위해 물러나기를 원했다.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효과적인 중재자로서의 이자보의 기록을 감안하여 그녀의 참여를 환영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가 1394년에 사망하면서 그 노력은 시들해졌다.
1390년대에 단명한 회복 기간 동안 샤를은 이자보가 왕태자, 즉 그들의 아들인 "도팽"의 "주요 보호자"가 되어 13세가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에서 추가적인 정치적 권력을 갖도록 조치했다.[21] 샤를은 1393년에 이자보를 자녀들의 공동 보호자로 임명했는데, 이는 왕족 공작들과 그녀의 형제인 바이에른의 루이와 공유되는 지위였으며, 오를레앙에게 완전한 섭정 권한을 부여했다.[34] 이자보를 임명하면서 샤를은 아버지 샤를 5세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행동했는데, 이 법률은 왕비에게 왕위 계승자를 보호하고 교육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35] 이러한 임명은 오를레앙과 왕족 삼촌들 간의 권력을 분리하여 파벌 간의 악의를 증가시켰다.[34] 이듬해, 샤를의 발작이 더욱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면서 이자보는 섭정 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왕족 공작과 프랑스 대원수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다양한 궁정 파벌의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21]
샤를 6세가 병을 앓는 동안, 오를레앙 공작은 공식적인 세금 징수관으로서 재정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고,[36] 그 후 10년 동안 이자보와 오를레앙은 세금 인상에 합의했다.[27] 1401년, 국왕이 부재한 틈을 타 오를레앙은 자신의 사람들을 배치하여 왕실 수입을 징수하게 했고, 이에 분노한 용담공 필리프는 보복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기병 600명과 기사 60명을 이끌고 파리에 진입하겠다고 위협했다. 그 당시 이자보는 오를레앙과 부르고뉴 사이에서 중재하여 유혈 사태와 내전 발발을 막았다.[1]
샤를 6세는 1402년까지 이자보를 신뢰하여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도록 허락했고, 재무부 통제권을 그녀에게 넘겼다.[21][1] 용담공 필리프가 1404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두공 장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자, 새 공작은 부르고뉴의 이익을 위해 왕실 재정에 접근하려 하면서 정치적 갈등을 계속했다. 오를레앙과 왕실 공작들은 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이자보는 왕관과 자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오를레앙과 손을 잡았다. 게다가 그녀는 장이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불신했는데, 장은 국왕의 사촌이었지만 오를레앙은 샤를 6세의 형제였다.[37]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근친상간으로 여겨졌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는지 여부는 동시대 역사가들, 특히 기번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그는 이 소문이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1405년에 명령한 세금 인상에 대한 보복으로 이자보에 대한 선전으로 퍼졌을 수 있다고 믿는다.[1][27]
무두공 장은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재정을 잘못 관리했다고 비난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실 수입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돈을 요구했다;[1] 용담공 필리프의 수입의 절반 정도가 프랑스 재무부에서 나왔다고 추정된다.[18] 장은 기사 1,000명으로 군대를 일으켜 1405년에 파리에 입성했다. 오를레앙은 이자보와 함께 그녀의 가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요새화된 멜룅 성으로 급히 후퇴했고, 그들은 하루 정도 뒤쳐졌다. 장은 즉시 추격하여 호위병과 왕족 아이들을 가로막았다. 그는 도팽을 사로잡아 부르고뉴 군대의 통제 하에 파리로 돌려보냈지만, 소년의 삼촌인 베리 공작은 왕실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 즉시 아이를 통제했다. 그 당시 샤를은 약 한 달 동안 정신이 맑아져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40] 이 사건은 '도팽 납치'로 알려지게 되었고, 거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41] 오를레앙은 재빨리 군대를 일으켰고, 장은 파리 시민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 그들은 국왕과 그의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거부했다. 베리가 파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도시의 문은 잠겼다. 10월, 이자보는 크리스틴 드 피잔의 편지와 왕실 평의회의 조례에 따라 분쟁을 중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2]
1407년, 무서운 장(존 공)은 오를레앙의 암살을 지시했다.[1] 11월 23일,[43] 고용된 암살자들은 파리의 거주지로 돌아가는 공작을 공격하여 말 고삐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자르고, "칼, 도끼, 나무 곤봉으로 그를 난도질하여 죽였다". 그의 시신은 도랑에 버려졌다.[44] 장(존 공)은 처음에는 암살에 대한 연루를 부인했지만,[1] 곧 이 행위가 여왕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고 인정하며, 이자보와 오를레앙 간의 불륜 혐의에 대해 왕권을 "복수"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했다.[45] 그의 왕족 삼촌들은 그의 자백에 충격을 받아 그를 파리에서 떠나게 했고, 왕립 평의회는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가문 간의 화해를 시도했다.[46]
1408년 3월, 장 프티는 대규모의 궁정 청중 앞에서 왕궁에서 길고 많은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당성을 제시했다. 프티는 왕이 부재한 동안 오를레앙이 폭군이 되었고,[47] 마법과 강신술을 행했으며, 탐욕에 휩싸였고, ''발 데 아르덩''에서 형제 살해를 계획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런 다음 프티는 장(존 공)이 오를레앙을 암살함으로써 왕과 왕권을 옹호했기 때문에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연설 동안 정신 이상 상태"였던 샤를은 프티의 주장에 설득되어 무서운 장(존 공)을 사면했지만, 9월에 사면을 철회했다.
암살 이후 폭력이 다시 발생했고, 이자보는 파리를 순찰하는 군대를 배치했으며, 도팽 루이, 기옌 공작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멜룅으로 도시를 떠났다. 8월에 그녀는 도팽을 위해 파리에 입성했고, 새해 초에 샤를은 13세의 도팽에게 여왕 부재 시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는 조례에 서명했다. 이 시기에 이자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왕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준비하는 도팽의 안전이었고, 그녀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49] 이 시점에서 여왕과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권력 투쟁에 매우 중요했으며, 이자보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물리적 통제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해졌고 그녀는 자주 입장을 바꿔야 했으며, 이로 인해 비판을 받고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1] 그녀는 1409년부터 1413년까지 부르고뉴파에 합류했고, 1413년부터 1415년까지 오를레앙파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입장을 바꿨다.
1409년 3월 샤르트르 화평에서, 무서운 장(존 공)은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오를레앙의 아들 샤를, 오를레앙 공작과 공개적으로 화해한 후 왕립 평의회에 복귀했지만,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이자보는 무서운 장(존 공)에게 ''튜텔''(도팽의 후견인)을 부여했고, 그를 파리의 수장으로 임명했으며, 왕의 가신인 장 드 몽테귀를 처형한 후 그가 도팽을 지도하도록 허락했다.[1] 그 시점에서 공작은 본질적으로 도팽과 파리를 통제했으며,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부과한 세금에 반대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인기가 있었다.[50] 무서운 장(존 공)에 대한 이자보의 행동은 1410년 가을에 파리로 진군하여 공작의 영향력으로부터 도팽을 "구출"하려는 아르마냑파를 분노하게 했다. 그 당시 파리 대학교의 구성원들은 특히 장 게르송은 왕립 평의회의 모든 분쟁 당사자들이 사임하고 즉시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51]
부르고뉴파와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1409년에 두 번째 이중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자보의 딸 미셸은 무서운 장(존 공)의 아들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했고, 이자보의 아들인 도팽 루이는 장(존 공)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결혼 전에 이자보는 무서운 장(존 공)과 조약을 협상하여 가족 계층과 왕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의했다.[1][52]
1415년 12월, 도팽 루이가 1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하면서 이자보의 정치적 입지는 불분명해졌다. 17세의 넷째 아들인 투렌 공작 장이 이제 도팽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2세의 가문에서 자랐다. 에노 백작 부인 자클린과 결혼한 도팽 장은 부르고뉴파 동조자였다. 샤를은 명석한 정신으로 아르마냑 백작을 프랑스 원수로 임명했다. 이자보는 1416년 자클린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개입을 시도했지만, 아르마냑은 이자보가 부르고뉴 가문과 화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빌헬름 2세는 어린 도팽이 파리에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았다.[56]
1417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4만 명의 군인과 함께 노르망디를 침략했다. 그 해 4월, 도팽 장이 사망하고 이자보의 여섯 번째이자 막내 아들인 샤를이 14세의 나이로 도팽이 되면서 권력의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아르마냑의 딸 앙주의 마리와 약혼했고 아르마냑파를 선호했다. 당시 아르마냑은 이자보를 투르에 감금하고 개인 재산(의복, 보석 및 돈)을 몰수하고 가신을 해산했으며 어린 자녀들과 시녀들로부터 격리시켰다. 그녀는 11월에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었다. 이자보는 그 시기부터 1420년의 트루아 조약까지 부르고뉴와 동맹을 유지했다.[21]
이자보는 처음에는 단독 섭정 역할을 맡았지만, 1418년 1월에 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자보와 장은 함께 의회(''Chambre des comptes'')를 폐지하고 파리와 국왕을 장악하는 데 전념했다. 장은 1418년 5월 28일 무력으로 파리를 장악하고 아르마냑파를 학살했다. 도팽은 도시에서 도망쳤다. 퐁탱의 연대기에 따르면, 도팽은 파리에 입성하는 이자보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7월 14일 장과 함께 도시에 입성했다.[57]
샤를은 도팽이라는 칭호를 얻은 직후 풀리에서 장과 휴전을 협상했다. 샤를은 1419년 9월 10일 몽테로-포트-오톤의 다리에서 장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며 개인적인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샤를이 다리에서 "칼로 쳐 죽인" 공포공 장의 암살을 위한 계략이었다. 그의 아버지 샤를 국왕은 즉시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내전은 장의 죽음 이후 종식되었다.[58] 도팽의 행동은 그의 정통성에 대한 더 많은 소문을 부추겼고, 그의 상속권 박탈은 트루아 조약의 발판을 마련했다.[21]
7. 내전
1380년대 후반과 1390년대 초반부터 이자보는 피렌체 대표단이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사건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요청했을 때 외교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31] 오를레앙 공작은 잔 갈레아초의 딸 발렌티나와 결혼했고, 부르고뉴 공작과 동맹을 맺어 궁정에서 친 비스콘티 파벌을 형성했다. 이에 반대하는 반 비스콘티 파벌은 이자보, 그녀의 형제인 바이에른의 루이 7세,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를 포함하여 형성되었다. 당시 이자보는 변화를 가져올 정치적 권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몇 년 후, 1396년 일곱 살 된 딸 이사벨라가 리처드 2세와 결혼했을 때, 이자보는 피렌체 대사 부오나코르소 피티와 함께 프랑스와 피렌체 간의 동맹을 성공적으로 협상했다.[32][33]
1390년대에 훗날 파리 대학교 총장이 되는 장 제르송은 서방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회의를 구성했고, 협상 기술을 인정하여 이자보를 회의에 참여시켰다. 프랑스는 아비뇽과 로마 교황이 모두 로마의 단일 교황청을 위해 물러나기를 원했다. 아비뇽의 클레멘스 7세는 효과적인 중재자로서의 이자보의 기록을 감안하여 그녀의 참여를 환영했다. 그러나 클레멘스 7세가 1394년에 사망하면서 그 노력은 시들해졌다.
1390년대 샤를 6세는 단명한 회복 기간 동안 이자보가 왕태자, 즉 그들의 아들인 도팽의 "주요 보호자"가 되어 13세가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에서 추가적인 정치적 권력을 갖도록 조치했다.[21] 샤를은 1393년에 이자보를 자녀들의 공동 보호자로 임명했는데, 이는 왕족 공작들과 그녀의 형제인 바이에른의 루이와 공유되는 지위였으며, 오를레앙에게 완전한 섭정 권한을 부여했다.[34] 이자보를 임명하면서 샤를은 아버지 샤를 5세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행동했는데, 이 법률은 왕비에게 왕위 계승자를 보호하고 교육할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35] 이러한 임명은 오를레앙과 왕족 삼촌들 간의 권력을 분리하여 파벌 간의 악의를 증가시켰다.[34] 이듬해, 샤를의 발작이 더욱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면서 이자보는 섭정 위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왕족 공작과 프랑스 대원수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동시에 다양한 궁정 파벌의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21]
샤를 6세가 병을 앓는 동안, 오를레앙 공작은 공식적인 세금 징수관으로서 재정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고,[36] 그 후 10년 동안 이자보와 오를레앙은 세금 인상에 합의했다.[27] 1401년, 국왕이 부재한 틈을 타 오를레앙은 자신의 사람들을 배치하여 왕실 수입을 징수하게 했고, 이에 분노한 용담공 필리프는 보복으로 군대를 소집하여 기병 600명과 기사 60명을 이끌고 파리에 진입하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이자보는 오를레앙과 부르고뉴 사이에서 중재하여 유혈 사태와 내전 발발을 막았다.[1]
샤를 6세는 1402년까지 이자보를 신뢰하여 오를레앙파와 부르고뉴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도록 허락했고, 재무부 통제권을 그녀에게 넘겼다.[21][1] 용담공 필리프가 1404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무두공 장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자, 새 공작은 부르고뉴의 이익을 위해 왕실 재정에 접근하려 하면서 정치적 갈등을 계속했다. 오를레앙과 왕실 공작들은 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찬탈하려 한다고 생각했고, 당시 이자보는 왕관과 자녀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오를레앙과 손을 잡았다. 게다가 그녀는 장이 자신의 신분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불신했는데, 장은 국왕의 사촌이었지만 오를레앙은 샤를 6세의 형제였다.[37]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근친상간으로 여겨졌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는지 여부는 동시대 역사가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이 소문이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1405년에 명령한 세금 인상에 대한 보복으로 이자보에 대한 선전으로 퍼졌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27]
무두공 장은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재정을 잘못 관리했다고 비난하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왕실 수입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에게 돈을 요구했다.[1] 용담공 필리프의 수입의 절반 정도가 프랑스 재무부에서 나왔다고 추정된다.[18] 장은 기사 1,000명으로 군대를 일으켜 1405년에 파리에 입성했다. 오를레앙은 이자보와 함께 그녀의 가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요새화된 멜룅 성으로 급히 후퇴했고, 그들은 하루 정도 뒤쳐졌다. 장은 즉시 추격하여 호위병과 왕족 아이들을 가로막았다. 그는 도팽을 사로잡아 부르고뉴 군대의 통제 하에 파리로 돌려보냈지만, 소년의 삼촌인 베리 공작은 왕실 평의회의 명령에 따라 즉시 아이를 통제했다. 그 당시 샤를은 약 한 달 동안 정신이 맑아져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40] 이 사건은 '도팽 납치'로 알려지게 되었고, 거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41] 오를레앙은 재빨리 군대를 일으켰고, 장은 파리 시민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 그들은 국왕과 그의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거부했다. 베리가 파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도시의 문은 잠겼다. 10월, 이자보는 크리스틴 드 피잔의 편지와 왕실 평의회의 조례에 따라 분쟁을 중재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42]
1407년, 무두공 장은 오를레앙의 암살을 지시했다.[1] 11월 23일,[43] 고용된 암살자들은 파리의 거주지로 돌아가는 공작을 공격하여 말 고삐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자르고, "칼, 도끼, 나무 곤봉으로 그를 난도질하여 죽였다". 그의 시신은 도랑에 버려졌다.[44] 장은 처음에는 암살에 대한 연루를 부인했지만,[1] 곧 이 행위가 여왕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고 인정하며, 이자보와 오를레앙 간의 불륜 혐의에 대해 왕권을 "복수"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주장했다.[45] 그의 왕족 삼촌들은 그의 자백에 충격을 받아 그를 파리에서 떠나게 했고, 왕립 평의회는 부르고뉴와 오를레앙 가문 간의 화해를 시도했다.[46]
1408년 3월, 장 프티는 대규모 궁정 청중 앞에서 왕궁에서 정당성을 제시했다. 프티는 왕이 부재한 동안 오를레앙이 폭군이 되었고,[47] 마법과 강신술을 행했으며, 탐욕에 휩싸였고, ''발 데 아르덩''에서 형제 살해를 계획했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그런 다음 프티는 장이 오를레앙을 암살함으로써 왕과 왕권을 옹호했기 때문에 무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샤를은 프티의 주장에 설득되어 무두공 장을 사면했지만, 9월에 사면을 철회했다.
암살 이후 폭력이 다시 발생했고, 이자보는 파리를 순찰하는 군대를 배치했으며, 도팽 루이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멜룅으로 도시를 떠났다. 8월에 그녀는 도팽을 위해 파리에 입성했고, 새해 초에 샤를은 13세의 도팽에게 여왕 부재 시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는 조례에 서명했다. 이 시기에 이자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왕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준비하는 도팽의 안전이었고, 그녀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49] 이 시점에서 여왕과 그녀의 영향력은 여전히 권력 투쟁에 매우 중요했으며, 이자보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물리적 통제는 양측 모두에게 중요해졌고 그녀는 자주 입장을 바꿔야 했으며, 이로 인해 비판을 받고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1] 그녀는 1409년부터 1413년까지 부르고뉴파에 합류했고, 1413년부터 1415년까지 오를레앙파와 동맹을 맺기 위해 입장을 바꿨다.
1409년 3월 샤르트르 화평에서, 무두공 장은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오를레앙의 아들 샤를과 공개적으로 화해한 후 왕립 평의회에 복귀했지만, 불화는 계속되었다. 그해 12월, 이자보는 무두공 장에게 ''튜텔''(도팽의 후견인)을 부여했고, 그를 파리의 수장으로 임명했으며, 왕의 가신인 장 드 몽테귀를 처형한 후 그가 도팽을 지도하도록 허락했다.[1] 그 시점에서 공작은 본질적으로 도팽과 파리를 통제했으며, 이자보와 오를레앙이 부과한 세금에 반대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인기가 있었다.[50] 무두공 장에 대한 이자보의 행동은 1410년 가을에 파리로 진군하여 공작의 영향력으로부터 도팽을 "구출"하려는 아르마냑파를 분노하게 했다. 당시 파리 대학교의 구성원들은 특히 장 제르송은 왕립 평의회의 모든 분쟁 당사자들이 사임하고 즉시 권력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51]
부르고뉴파와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1409년에 두 번째 이중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자보의 딸 미셸은 무두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했고, 이자보의 아들인 도팽 루이는 장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결혼 전에 이자보는 무두공 장과 조약을 협상하여 가족 계층과 왕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정의했다.[1][52]
이자보가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1411년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이 발발했다. 장은 첫 해에 우위를 점했지만 도팽은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그는 파리에서 반란을 선동한 장을 물리칠 힘이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무두공 장의 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왕실 재무부에서 왕족 모든 구성원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다. 1414년, 당시 17세였던 아들이 이끌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 샤를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도팽은 충성을 바꾸어 장과 합류했는데, 이자보는 이를 현명하지 못하고 위험한 행동으로 여겼다. 그 결과 파리에서는 내전이 계속되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부 분열을 틈타 북서 해안을 침략했고,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1] 군 지도자 거의 한 세대가 하루 만에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왕가와 아르마냑파와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던 장은 헨리 5세가 북부 프랑스 도시들을 정복하는 동안 중립을 유지했다.[55]
1415년 12월, 도팽 루이가 18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질병으로 사망하면서 이자보의 정치적 입지는 불분명해졌다. 17세의 넷째 아들인 투렌 공작 장이 이제 도팽이 되었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2세의 가문에서 자랐다. 에노 백작 부인 자클린과 결혼한 도팽 장은 부르고뉴파 동조자였다. 빌헬름은 부르고뉴파가 도시를 약탈하고 파리 시민들이 베르나르 7세 아르마냑 백작이 시작한 또 다른 세금 인상에 반란을 일으킨 혼란기에 그를 파리로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샤를은 명석한 정신으로 아르마냑 백작을 프랑스 원수로 임명했다. 이자보는 1416년 자클린과의 만남을 주선하여 개입을 시도했지만, 아르마냑은 이자보가 부르고뉴 가문과 화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빌헬름 2세는 어린 도팽이 파리에 들어가는 것을 계속 막았다.[56]
1417년, 헨리 5세는 4만 명의 군인과 함께 노르망디를 침략했다. 그 해 4월, 도팽 장이 사망하고 이자보의 여섯 번째이자 막내 아들인 샤를이 14세의 나이로 도팽이 되면서 권력의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앙주의 마리와 약혼했고 아르마냑파를 선호했다. 당시 아르마냑은 이자보를 투르에 감금하고 개인 재산(의복, 보석 및 돈)을 몰수하고 가신을 해산했으며 어린 자녀들과 시녀들로부터 격리시켰다. 그녀는 11월에 부르고뉴 공작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었다. 이자보는 그 시기부터 1420년의 트루아 조약까지 부르고뉴와 동맹을 유지했다.[21]
이자보는 처음에는 단독 섭정 역할을 맡았지만, 1418년 1월에 장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자보와 장은 함께 의회(''Chambre des comptes'')를 폐지하고 파리와 국왕을 장악하는 데 전념했다. 장은 1418년 5월 28일 무력으로 파리를 장악하고 아르마냑파를 학살했다. 도팽은 도시에서 도망쳤다. 퐁탱의 연대기에 따르면, 도팽은 파리에 입성하는 이자보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7월 14일 장과 함께 도시에 입성했다.[57]
샤를은 도팽이라는 칭호를 얻은 직후 풀리에서 장과 휴전을 협상했다. 샤를은 1419년 9월 10일 몽테로-포트-오톤의 다리에서 장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며 개인적인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이 회담은 샤를이 다리에서 "칼로 쳐 죽인" 무두공 장의 암살을 위한 계략이었다. 그의 아버지 샤를 국왕은 즉시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했다. 내전은 장의 죽음 이후 종식되었다.[58] 도팽의 행동은 그의 정통성에 대한 더 많은 소문을 부추겼고, 그의 상속권 박탈은 트루아 조약의 발판을 마련했다.[21]
1419년까지 헨리 5세는 노르망디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주민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부르고뉴의 새로운 공작인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이자보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고, 이자보는 국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1420년 헨리는 여왕과 회담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고, 그 후 이자보는 "헨리 5세의 사절이 설득력 있게 제시했을 주장에 굴복했다"고 한다.[59] 프랑스는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도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태였다. 샤를 6세는 "부르고뉴 공작 암살에 연루되어 평화를 깨뜨린" 것으로 간주하여 도팽을 폐위시켰고, 1420년에는 도팽이 "왕위나 다른 어떤 칭호도 계승할 자격이 없게 되었다"고 썼다.[60] 살리카법에 따라 왕위 계승 서열에 있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런던에 억류되었다.[1][61]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자보는 1420년 5월 샤를 왕과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단지 [도팽의] 불법적인 지위를 확인했을 뿐"이라고도 한다.[1] 국왕의 질병으로 인해 조약 서명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이자보가 대신 참석했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프랑스를 맹세로 잃게 한 영원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고도 한다.[1] 수 세기 동안 이자보는 트루아 조약 때문에 왕관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받았다.[21] 조약 조건에 따라 샤를은 프랑스 국왕으로 남았지만, 샤를과 이자보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는 노르망디에서 정복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프랑스를 통치하는 샤를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다.[62] 이자보는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59]
샤를 6세는 1422년 10월에 사망했다. 헨리 5세는 같은 해 초에 사망했기 때문에,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헨리 6세는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베드포드 공작 존이 섭정으로 활동했다.[1]
8. 트루아 조약과 이자보의 말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부 분열을 틈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1] 1419년까지 헨리 5세는 노르망디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주민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인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이자보에게 엄청난 압력을 가했고, 이자보는 국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1420년 헨리는 여왕과 회담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고, 그 후 애덤스에 따르면 이자보는 "헨리 5세의 사절이 설득력 있게 제시했을 주장에 굴복했다"고 한다.[59]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자보는 1420년 5월 샤를 왕과 함께 트루아 조약에 서명했다. 기번스는 이 조약이 "단지 [도팽의] 불법적인 지위를 확인했을 뿐"이라고 썼다.[1] 국왕의 질병으로 인해 조약 서명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이자보가 대신 참석했는데, 기번스에 따르면 이로 인해 그녀는 "프랑스를 맹세로 잃게 한 영원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1] 조약 조건에 따라 샤를은 프랑스 국왕으로 남았지만, 샤를과 이자보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한 헨리 5세는 노르망디에서 정복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프랑스를 통치하는 샤를의 후계자가 될 예정이었다.[62] 이자보는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파리에서 살게 되었다.[59]
샤를 6세는 1422년 10월에 사망했다. 헨리 5세는 같은 해 초에 사망했기 때문에,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헨리 6세는 트루아 조약에 따라 프랑스 국왕으로 선포되었고, 베드포드 공작 존이 섭정으로 활동했다.[1] 이자보는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생 폴 호텔에서 그녀의 오빠의 두 번째 부인인 알랑송의 카트린과 함께 은퇴하여 살았다. 그녀는 시녀인 아멜리 폰 오르텐부르크와 마담 드 모이와 동행했는데, 마담 드 모이는 독일에서 와서 1409년부터 그녀와 함께 ''dame d'honneur''로 머물렀다. 이자보는 1435년 9월 말경 그곳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59]
9. 평판과 유산
샤를 6세의 갑작스러운 정신병 발병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신의 분노와 처벌의 징조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마법의 결과로 여겨졌다.[15] 현대 역사가들은 그가 편집성 정신분열증의 발병으로 고통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16]
왕의 회복을 돕기 위해 오락 프로그램이 권해졌다. 궁정의 한 일원은 샤를에게 이자보와 다른 부인들에게 야만인으로 변장하여 이자보의 시녀인 카트린 드 파스타베린의 재혼을 축하하는 가면무도회에 침입하는 일행에 합류하여 놀라게 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발 데 아르덩"(불타는 사람들의 무도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샤를은 거의 죽을 뻔했고, 오를레앙 공작(왕의 형제)이 가져온 횃불에서 나온 불꽃이 무용수 의상 중 하나에 불을 붙이면서 4명의 댄서가 불에 타 죽었다. 이 재앙은 왕의 통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 파리 시민들은 이를 궁정적 타락의 증거로 여기고 귀족들의 강력한 구성원들에게 반란을 위협했다. 대중의 분노는 왕과 오를레앙 공작을 강요했고, 동시대 연대기 작가는 그를 국왕 살해와 마법 시도로 비난했다. 이에 대한 속죄를 제공해야 했다.[17]
이자보의 행적과 정치 활동은 그녀의 결혼 이후 잘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남편의 반복되는 질병으로 인해 그녀가 차지하게 된 비정상적인 권력의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며, 역사가들은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조차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작고 검은 머리" 또는 "키가 크고 금발"로 다양하게 묘사되며, 동시대의 증언은 상반된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녀에 대해 "아름답고 매혹적"이거나 "복수병으로 인해 비대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묘사했다.[21][29] 십 대에 결혼한 이후 프랑스에 계속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줄어들지 않는 짙은 독일 억양으로 말했고, 터치만은 이를 그녀에게 프랑스 궁정에서 "이방인"의 인상을 주었다고 묘사했다.[25] 트레이시 아담스는 이자보를 궁정 정치를 쉽고, 우아하며, 카리스마 있게 헤쳐나가는 재능 있는 외교관이라고 묘사한다.[30]
이자보는 과거 역사가들로부터 방탕하고, 나약하며, 우유부단한 지도자로 치부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제 그녀가 이 시기의 여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적극적인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샤를의 질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져야 했다고 본다. 비판론자들은 그녀가 잉글랜드와의 협상, 특히 트루아 조약에 대한 그녀의 역할과 오를레앙 공작과의 불륜 루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을 받아들였다.[67] 기번스는 여왕의 의무는 왕위 계승을 확보하고 남편을 돌보는 것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이자보가 이 두 가지 모두에 실패했다고 묘사했다고 썼다. 기번스는 심지어 그녀의 외모조차 불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묘사는 그녀가 선하게 묘사될 것인지, 악하게 묘사될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68]
어머니로서 형편없다는 소문이 돌았던 그녀는 "근친상간, 도덕적 부패, 반역, 탐욕, 방탕 ... 정치적 야망과 관여" 혐의를 받았다.[69] 애덤스는 20세기 후반에 역사가들이 그녀의 평판을 재평가하여, 특히 기번스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그녀에게 가해진 많은 비난을 무혐의 처리했다고 썼다. 더욱이 애덤스는 자신이 동시대 연대기를 파고들기 전까지 이자보에 대한 혐의를 믿었다고 인정한다. 거기서 그녀는 이자보에게 불리한 증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많은 소문이 단지 몇 구절, 특히 핀토인의 친 부르고뉴 저작에서 나왔을 뿐이었다.[70]
왕의 질병이 시작된 후, 샤를의 정신 질환과 통치 능력 부족이 이자보의 마법 때문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1380년대 초부터 궁정이 마법에 깊이 빠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1397년, 오를레앙 공작의 부인 발렌티나 비스콘티는 마법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파리를 떠나야 했다.[71] "미친 왕"의 궁정은 치료를 약속하며 다양한 파벌에 의해 종종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마법사들을 끌어들였다. 샤를을 매혹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목록이 작성되었고, 이자보와 오를레앙 공작이 모두 포함되었다.[72]
간통 혐의가 만연했다. 핀토인의 연대기에 따르면 "[오를레앙]은 젊고 예쁜 바이에른의 이자보, 즉 여왕인 처제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 이 열정적인 갈색 머리 여인은 스물두 살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정신 이상자였으며, 그녀의 매력적인 매제는 춤추기를 좋아했고, 그 외에도 온갖 일들을 상상할 수 있다."[73] 핀토인은 여왕과 오를레앙 공작에 대해 그들이 샤를을 무시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며 "육체의 쾌락에 탐닉하며",[74] 궁정 연회에 많은 돈을 썼다고 말했다.[27] 그러나 애덤스에 따르면 이 불륜 혐의는 핀토인의 연대기에서 단 한 단락에 근거하며, 더 이상 증거로 간주되지 않는다.[75]
이자보는 사치스럽고 비싼 유행, 보석이 박힌 드레스, 그리고 굵은 이중 헤닌으로 덮인 키가 큰 껍질 모양으로 꼬인 정교한 땋은 머리를 즐겼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헤닌은 지나가기 위해 넓어진 문이 필요했다고 한다.[76] 1406년, 부르고뉴 지지 시사 풍자 소책자는 이자보의 소위 연인들을 열거했다.[39] 그녀는 단일 파벌을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내전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는 "멍청한" 독일인으로 묘사되었고, 그녀의 자녀에 대해 "그녀는 새로운 임신이 새로운 선물을 제공하는 한에서만 기쁨을 느꼈다"고 하며, 그녀의 정치적 실수는 그녀가 뚱뚱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1]
18세기와 19세기에 역사가들은 이자보를 "간통하고, 사치스럽고, 참견하기 좋아하고, 음모를 꾸미고, 돈을 헤프게 쓰는 여왕"으로 묘사하며 그녀의 정치적 업적과 영향력을 간과했다. 루이즈 드 카라리오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에 프랑스의 "나쁜" 여왕들에 관한 인기 있는 책은, 애덤스에 따르면, "이자보의 흑색 전설이 프랑스 왕족 전체와 특히 여왕에 대한 격렬한 공격에서 그 완전한 표현을 얻는" 곳이다.[77] 카라리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자보는 국가의 파멸을 가져오고 적들에게 팔기 위해 분노에 의해 길러졌다. 바이에른의 이자보가 나타났고, 1385년 7월 17일 아미앵에서 거행된 그녀의 결혼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순간으로 여겨질 것이다."[78] 이자보는 오를레앙 공작의 열정적인 연인이자, 사드 후작의 미출판된 1813년 소설 ''프랑스 여왕 이자벨 드 바이에르의 비밀 이야기''의 영감으로 그려졌는데, 이에 대해 애덤스는 "여왕을 그의 기사도의 이데올로기에 복종시키면서, [사드 후작]은 그녀의 탐욕에 차갑고 계산적인 폭력을 부여한다 ... 최대의 만족을 위해 그녀의 탐욕을 신중하게 관리하는 여성"이라고 썼다.[79] 그녀는 사드가 "여왕에 대한 혐의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고 인정했다고 말한다.[80]
10. 자녀
이자보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며 함께 여행하고, 선물을 사주고, 편지를 쓰고, 경건한 책을 구입해주고, 딸들의 교육을 주선하는 등 자녀 양육에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거부하고, 당시 관습이었던 아들들을 다른 집에 보내는 것에 반대했다. 팽토아의 기록에 따르면, 이자보는 셋째 아들 장을 에노에 보내도록 규정한 결혼 계약에 당황했다고 한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딸들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했다.[1]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는 아이들을 파리에서 내보냈지만, 여행하기에는 너무 어린 막내 아들 장과 함께 남았다. 첼레스틴회는 "그녀와 아이들이 수도원과 교회에 들어가서 종종 포도원과 정원을 다니며 헌신과 오락, 그리고 그녀와 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있도록 허용했다.[89]
이자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이름 출생 사망 비고 샤를 1386년 요절 첫 번째 도팽 잔 1388년 1390년 이자벨 1389년 1409년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의 왕비 잔 1391년 1433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결혼 샤를 1392년 1398년 두 번째 도팽이었으나 요절 마리 1393년 1438년 푸아시의 수도원에 들어감 미셸 1393년 1422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결혼 루이 1397년 1415년 기옌 공작, 세 번째 도팽이었으나 요절 장 1398년 1417년 투렌 공작, 네 번째 도팽이었으나 요절 카트린 1401년 1437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왕비, 헨리 6세의 어머니 샤를 1403년 1461년 다섯 번째 도팽, 프랑스 왕 샤를 7세 필리프 1407년 요절 잔 다르크 사생아설의 근거가 됨
11. 가계
이름 출생 사망 비고 샤를 1386년 1386년 도팽이었으나 요절 잔 1388년 1390년 이자벨 1389년 1409년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의 왕비 잔 1391년 1433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결혼 샤를 1392년 1398년 두 번째 도팽이었으나 요절 마리 1393년 1438년 푸아시의 수도원에 들어감 미셸 1395년 1422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와 결혼 루이 1397년 1415년 기옌 공작, 세 번째 도팽이 되었으나 요절 장 1398년 1417년 투렌 공작, 네 번째 도팽이 되었으나 요절 카트린 1401년 1437년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왕비, 헨리 6세의 어머니 샤를 7세 1403년 1461년 다섯 번째 도팽, 프랑스 왕 필리프 1407년 1407년
현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자보는 어린 시절에 아이들과 가까이 지냈고, 그들과 함께 여행했으며, 선물을 사주고, 편지를 쓰고, 경건한 책을 구입했으며, 딸들의 교육을 주선했다. 그녀는 떨어져 지내는 것을 거부했고, 아들들을 다른 집에 보내 살게 하는 것에 반대했다(당시 관습).[1]
참조
[2]
서적
Called Elisabeth until her marriage, Gibbons says she started using the name Isabeau probably soon after becoming queen of France. See Gibbons, 53. Famiglietti writes that she signed letters in French as "Ysabel", transformed first to "Ysabeau" and then "Isabeau" in the 15th century. See Famiglietti,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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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bons writes of Isabeau, "she was not quite the 'nobody' that had been suggested ... it is clear that [[Charles V of France|Charles V]] himself saw the Wittelsbach clan as useful potential allies in the continuing war with England." See Gibbons,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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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n [[Tracy Adams]] speculates that the depiction of obesity might stem from a mistranslation saying the Queen bore a heavy burden, which Adams believes refers to the heavy burden Isabeau assumed because of Charles' illness. See Adams,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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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had deposed and murdered Isabeau's maternal grandfather [[Bernabò Visconti]] of Milan, and his active aggression toward other Italian states caused factionalism in France, affecting in particular relations with the Avignon [[Antipope Clement VII|Pope Clement VII]], whose Papal dispensation allowed the marriage between Visconti's daughter Valentina to her first cousin Louis, the duke of Orléans, the King's brother. See Adams, 8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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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ified on 26 September 1396. See Adams (20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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